봄마다 종묘상에서 씨앗 봉투를 사면서 "작년에 우리 밭에서 그렇게 잘 자란 고추인데, 저 씨앗을 받아둘 걸" 하고 아쉬워하신 적 없으신가요. 채소 씨앗 한 봉투 값이 해마다 조금씩 오르는 요즘, 텃밭에서 잘 자란 작물의 씨앗을 직접 받아 이듬해 다시 심는 채종은 실속과 재미를 동시에 챙기는 가을 준비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채종의 황금기가 바로 지금, 8월입니다. 봄 상추는 꽃대 끝에 씨앗을 매달고 있고, 고추와 토마토는 완숙과가 달려 있고, 마당 봉숭아는 씨 꼬투리가 통통하게 여물어 가는 때이니까요. 작물별로 씨앗 받는 법과, 받은 씨앗을 내년 봄까지 살려두는 보관 3원칙, 그리고 채종 전에 꼭 알아야 할 F1 품종 상식까지 정리해봤습니다.
■ 왜 씨앗을 받는가 — 봉투값 아끼는 것 이상의 재미
채종의 첫 번째 이유는 물론 실속입니다. 상추 씨앗은 한 포기에서만 수백 개가 나오니, 한 번 받아두면 몇 해 봄가을 파종이 해결됩니다. 그런데 오래 텃밭을 하신 분들은 실속보다 다른 이유를 더 꼽습니다. 내 밭에서 여러 해 씨앗을 받아 이어 심으면, 그 씨앗이 우리 밭 흙과 날씨에 조금씩 적응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들이 대를 물려 심던 토종 씨앗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하지요. 잘 자란 포기, 병 없이 버틴 포기를 골라 씨앗을 받는 일은 내년 농사의 선발전인 셈입니다. 씨앗 받는 재미를 알면 텃밭 농사가 한 해짜리가 아니라 해마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됩니다.
■ 8월의 채종 대상 — 상추·고추·토마토·봉숭아
지금 받기 좋은 대표 작물 네 가지입니다. 상추는 봄에 심은 포기가 꽃대를 올려 노란 꽃을 피운 뒤, 민들레처럼 하얀 솜털 갓이 달린 씨앗을 맺습니다. 솜털이 보송하게 벌어진 꽃송이를 손으로 훑거나 꽃대째 잘라 봉투에 거꾸로 넣고 흔들면 까만 씨앗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고추는 빨갛게 완전히 익은 완숙과를 고릅니다. 반을 갈라 씨를 긁어낸 뒤 그늘에서 바싹 말리면 되고, 매운 고추는 씨를 만질 때 장갑을 끼는 것이 좋습니다. 토마토는 조금 특별합니다. 씨앗을 감싼 미끈한 젤리층에 발아 억제 성분이 있어, 완숙 토마토의 씨를 과육째 컵에 넣고 물을 부어 2~3일 두었다가 발효로 젤리층이 벗겨지면 체에 걸러 씻어 말립니다. 봉숭아는 타이밍 싸움입니다. 씨 꼬투리가 통통해지고 살짝 노르스름해질 때 건드리면 톡 터지며 씨가 튀어나가니, 터지기 직전의 꼬투리를 봉투 안에서 감싸 쥐고 따면 한 알도 흘리지 않습니다.

■ 받는 법의 두 기둥 — 완숙, 그리고 바싹 말리기
작물이 달라도 원칙은 두 가지로 통합니다. 첫째는 완숙입니다. 씨앗은 열매가 완전히 익어야 속이 여뭅니다. 풋고추나 덜 익은 토마토에서 받은 씨앗은 싹이 잘 트지 않으니, 채종용 열매는 따지 말고 포기에서 끝까지 익혀야 합니다. 밭에서 제일 실한 포기 하나를 아예 채종용으로 정해두고 열매를 남기는 것이 요령입니다. 둘째는 바싹 말리기입니다. 씨앗 속 수분이 남아 있으면 보관 중에 곰팡이가 피거나 발아력이 뚝 떨어집니다. 씨앗을 신문지나 키친타월에 한 겹으로 펼쳐 직사광선이 아닌 바람 잘 드는 그늘에서 일주일에서 열흘쯤 말리는데, 한여름 뙤약볕에 두면 씨눈이 상할 수 있어 그늘 건조가 정석입니다. 손톱으로 눌러도 자국이 나지 않고 딱 소리가 날 만큼 마르면 합격입니다.
■ 보관 3원칙 — 밀봉·저온·건조, 답은 냉장고 채소칸
잘 받은 씨앗도 보관이 나쁘면 내년 봄에 싹이 트지 않습니다. 씨앗 보관의 3원칙은 밀봉, 저온, 건조입니다. 씨앗은 살아 숨 쉬는 생명이라 온도와 습도가 높으면 그만큼 빨리 힘을 씁니다. 바싹 말린 씨앗을 종이봉투나 한지에 싸서 작물 이름과 받은 날짜를 적고, 그 봉투째 지퍼백이나 밀폐 유리병에 넣어 밀봉합니다. 병 안에 김 봉지에서 나온 실리카겔 방습제 한두 개를 같이 넣으면 습기 걱정이 크게 줄어듭니다. 두는 곳은 냉장고 채소칸이 가장 무난합니다. 온도가 낮고 일정해서 씨앗의 숨을 천천히 재워두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냉동실은 수분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씨앗이 얼어 상할 수 있어 초보에게는 권하지 않고, 베란다는 여름 고온과 겨울 결로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 씨앗 수명 감각 — 몇 년까지 믿고 쓸 수 있나
씨앗마다 수명이 다르다는 것도 알아두면 봄에 낭패가 없습니다. 흔히 통용되는 감각으로 파·양파·당근 씨앗은 12년으로 수명이 짧은 축이고, 상추와 고추는 23년, 토마토·무·배추는 34년, 오이·호박 같은 박과는 45년까지도 발아력이 유지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보관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지니 어디까지나 감각의 기준입니다. 묵은 씨앗이 미덥지 않을 때는 봄 파종 전에 씨앗 열 알을 젖은 키친타월에 싸서 며칠 두는 발아 시험을 해보면 됩니다. 열 알 중 일고여덟이 싹을 내밀면 안심하고 쓰고, 절반 이하면 새 씨앗을 사는 쪽이 속 편합니다.

■ 채종 전 필수 상식 — F1 품종은 받아도 같은 게 안 나옵니다
여기서 꼭 짚어야 할 상식이 하나 있습니다. 종묘상에서 산 씨앗 봉투에 F1 또는 일대잡종이라고 적혀 있다면, 그 작물에서 받은 씨앗은 어미와 같은 모습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F1은 서로 다른 두 계통을 교배해 만든 1세대 잡종이라 그 세대에서만 균일하고 왕성한 특성이 나오고, 거기서 받은 다음 세대는 형질이 제각각으로 갈라진다고 합니다. 싹이 아예 안 트는 것은 아니지만 열매 크기와 맛이 들쭉날쭉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채종을 목표로 한다면 고정종이나 토종 씨앗으로 시작하는 것이 맞습니다. 봉숭아, 토종 상추, 재래 고추처럼 오래 이어 심어온 작물들이 채종 상대로 좋고, F1 품종 밭에서는 채종 대신 봄마다 씨앗을 새로 사는 것이 결과가 안정적입니다.
■ 기록이 절반입니다 — 씨앗 봉투에 적어둘 것들
받은 씨앗이 몇 가지를 넘어가면 기억은 반드시 뒤섞입니다. 이듬해 봄, 까만 씨앗 세 봉지를 앞에 두고 어느 것이 상추이고 어느 것이 봉숭아였는지 헷갈리는 일이 생각보다 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채종의 마무리는 기록입니다. 봉투마다 작물 이름, 받은 연도와 달, 그리고 특징 한 줄을 적어두세요. 특징 한 줄이란 이런 것입니다. "장마에도 안 무른 고추", "제일 늦게까지 안 쇤 상추", "마당 담장 밑 진분홍 봉숭아". 이 한 줄이 이듬해 무엇을 골라 심을지 정하는 근거가 되고, 몇 해 쌓이면 우리 집 씨앗의 족보가 됩니다. 공책 한 권을 씨앗 장부로 정해 받은 씨앗과 심은 결과를 해마다 적어가면, 텃밭 농사의 재미가 한 층 깊어집니다.
■ 씨앗 나눔 — 봉투 하나가 이웃을 만듭니다
씨앗 받기의 마지막 재미는 나눔입니다. 상추 한 포기에서 나온 씨앗만 해도 우리 집이 다 쓰지 못할 양이니, 작은 봉투에 나눠 담아 이름과 특징을 적으면 훌륭한 선물이 됩니다. 요즘은 지역 도서관이나 농업기술센터에서 씨앗 도서관, 토종 씨앗 나눔 행사를 여는 곳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카페 안에서도 가을에 받은 씨앗을 서로 나누는 자리를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내 밭의 봉숭아 씨앗이 이웃 회원님 마당에서 꽃을 피우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입니다. 나눔 의향이 있으신 분은 댓글로 작물 이름을 남겨주세요.
■ 자주 묻는 질문
"씨앗에 붙은 과육을 꼭 씻어야 하나요?" 고추처럼 마른 과육은 털어내는 정도면 되지만, 토마토·오이처럼 물기 많은 과육은 씻어내야 곰팡이 없이 마릅니다. 특히 토마토는 앞서 말씀드린 발효 과정을 거치는 것이 발아율에 유리하다고 합니다.
"말린 씨앗을 상온 서랍에 두면 안 되나요?" 한 해 안에 쓸 씨앗이면 서늘하고 건조한 실내 서랍도 괜찮습니다. 다만 2년 이상 두고 쓸 생각이면 냉장고 채소칸이 발아력을 훨씬 오래 지켜줍니다.
"채종한 씨앗은 소독이 필요한가요?" 병든 포기만 피해서 받았다면 가정 텃밭 수준에서는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미덥지 않으면 봄 파종 전 50도 안팎 따뜻한 물에 20~30분 담그는 온탕 처리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트에서 산 고추나 토마토에서 씨를 받아도 되나요?" 싹은 트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F1 품종의 열매라 어미와 다른 모습이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재미로는 좋아도 농사 계획의 중심으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냉장고에서 꺼낸 씨앗은 바로 심어도 되나요?" 봉투째 꺼내 반나절쯤 실온에 두었다가 여는 것이 좋습니다. 차가운 씨앗 봉투를 바로 열면 결로로 습기가 차기 때문입니다.
"호박이나 오이 씨앗도 지금 받을 수 있나요?" 됩니다. 늙은 호박이나 노각처럼 완전히 누렇게 익힌 열매에서 씨를 긁어 씻어 말리면 되는데, 박과는 이웃 밭 품종과 벌이 꽃가루를 섞어놓는 교잡이 잦아 어미와 다른 열매가 나오는 일이 많다는 점은 감안하셔야 합니다.
"꽃씨도 같은 방법인가요?" 같습니다. 봉숭아처럼 꼬투리가 터지는 꽃은 터지기 직전에, 백일홍·메리골드처럼 꽃송이에 씨가 앉는 꽃은 꽃이 완전히 마른 뒤 훑어서 받으면 됩니다. 보관 3원칙도 채소와 동일합니다.
"지금 받은 상추 씨앗을 올가을에 바로 심어도 되나요?" 됩니다. 다만 갓 받은 상추 씨앗은 잠시 잠을 자는 휴면 상태라 바로 뿌리면 발아가 더딜 수 있는데, 밀봉해 냉장고에 몇 주 두었다가 꺼내 뿌리면 잠이 깨어 싹이 고르게 튼다고 합니다. 가을 파종 일정과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셈입니다.
■ 정리하면
① 8월은 상추·고추·토마토·봉숭아 채종의 황금기 ② 받는 법의 두 기둥은 완숙된 열매에서, 그늘에서 바싹 말리기 ③ 보관은 밀봉·저온·건조, 방습제 넣어 냉장고 채소칸 ④ 씨앗 수명은 파·당근 12년, 상추·고추 23년, 박과 4~5년 감각 ⑤ F1 품종은 채종해도 같은 작물이 안 나오니 채종은 고정종·토종으로.
올가을 씨앗 받기에 도전하시는 회원님들의 채종 사진과 나눔 소식을 원예·텃밭 게시판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씨앗 봉투와 밀폐 보관병, 방습제는 여가상회에서도 준비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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